'연애 금지'라고 써 붙인 러닝크루가 있다

 

'연애 금지'라고 써 붙인 러닝크루가 있다


취미 모임 규칙에 이런 게 붙어 있다.

여미새 금지. 친목질 금지. 전도 금지.

어떤 크루에는 연애 금지까지 붙었다.

같이 달리는 모임이다. 연애를 왜 금지할까.

답부터 말한다. 소용없어서 붙인 거다. 러닝크루는 뛰는 모임이 아니라, 뛰는 걸 명분으로 사람을 붙여놓는 장치다. 연애만 골라서 빼는 건 구조상 불가능하다.


90명 중에 커플이 셀 수 없이 나왔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기준 90명쯤 되는 크루에서 사귀고 헤어지는 커플이 셀 수 없이 나왔다. 모임의 본목적이 흐려진다는 우려가 생겼고, 특단의 대책으로 연애 금지가 나왔다.

참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요즘 러닝크루는 달리기하는 곳이 아니라 연애하러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많고, 일종의 소개팅 플랫폼이 됐다고.

명시적으로 안 쓰는 크루도 손은 쓴다. 이성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눈에 띄면 운영진이 중간에 끼어들거나 제재한다.


왜 하필 달리기일까

배드민턴 모임에서 연애 금지 규칙을 봤다는 얘기는 잘 안 들린다. 달리기에만 뭔가가 있다.


첫째, 소규모로 쪼개진다. 크루는 페이스별로 그룹을 나눈다. 630, 530 같은 숫자가 그룹 이름이다. 서른 명이 모여도 실제로는 대여섯 명씩 붙어서 뛴다.

둘째, 정면을 본다.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게 아니라 나란히 앞을 보며 말한다. 눈을 안 마주쳐도 되니까 말이 쉽게 나온다.

셋째, 같이 힘들다. 공동의 고통만큼 빠른 접착제가 없다.

넷째, 매주 반복된다. 소개팅은 한 번이지만 크루는 다음 주에 또 만난다.



방장부터 판에 먹혔다

한 러너의 후기다. 그날 나온 사람 수대로 페이스 그룹을 짜는 크루에 갔는데, 여자가 나오면 남자들이 단체로 그쪽에 맞추려 들었다. 방장은 남자들 페이스를 먼저 물어 앞 그룹으로 보내놓고, 자기는 몸이 안 좋다며 초보 그룹으로 갔다. 그러고는 뛰다 걷다 하며 질문만 했다.

여기서 봐야 할 건 방장이 나쁜 사람이라는 게 아니다.


규칙을 만들고 집행할 사람이 제일 먼저 넘어갔다는 것이다.

크루에서 그룹을 짜는 사람은 방장이다. 연애 금지를 써 붙일 수 있는 사람도 방장이다. 그 방장이 자기 손으로 그룹을 짜면서 자기를 원하는 자리에 넣었다.

판이 그만큼 세다. 만든 사람도 못 버틴다.



잘 굴러가는 크루일수록 더 나온다

1년을 뛴 사람의 후기를 보자. 좋은 크루 이야기다.

그 크루의 기조는 '즐겁고 안전한 달리기'였다. 참고 버티다 다치느니 상황을 알리고 속도를 조절하자는 게 운영진 생각이었다. 누가 느려지면 발을 맞추고 지친 사람을 기다렸다.

"더 못 달리겠어요. 우리 잠깐 쉬어요!"

훈훈한 얘기다. 그런데 이 크루가 회원들에게 실제로 시킨 게 뭔지 보자.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매주, 자기가 지금 힘들다고 말하게 하는 것이다.

소개팅에서 저 말은 못 한다. 회사에서도 못 한다. 이 사람도 크루에서 저 말이 나오게 될 즈음에야 회사에서 힘든 티를 낼 수 있게 됐다고 썼다.

약한 상태를 먼저 꺼내놓는 사이. 그게 몇 주 만에 만들어진다. 그다음에 뭐가 오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다. 크루 운영을 잘할수록 연애가 더 나온다.

허술한 크루는 각자 뛰다 흩어진다. 잘 굴러가는 크루는 서로 기다리고 챙긴다. 연애 금지가 필요해지는 쪽은 후자다. 저 규칙은 실패한 크루가 아니라 성공한 크루에 붙는다.





🎯 기획자의 노트 — 판을 깔면 판이 시킨다

행사를 짜다 보면 이런 주문을 받는다. "네트워킹은 자연스럽게 되게 해주세요."

자연스럽게 되는 건 없다. 사람이 섞이는 건 전부 설계의 결과다. 몇 명씩 묶는지, 마주 보게 하는지 나란히 두는지, 같이 뭘 하게 하는지, 몇 번 만나게 하는지. 이 넷을 정하는 순간 그날 벌어질 일의 대부분이 정해진다.

러닝크루는 이 넷이 전부 켜져 있다. 대여섯 명씩 쪼개고, 나란히 세우고, 같이 힘들게 하고, 매주 반복한다. 소개팅을 설계하라고 해도 이보다 잘 짜기는 어렵다.

그래서 연애 금지가 안 먹힌다. 규칙은 안내문에 있고 설계는 몸에 있다. 몸이 이긴다. 방장도 못 버텼다.

기획자가 착각하기 쉬운 지점이 여기다. 판이 만들어낸 결과 중에 마음에 드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골라낼 수 있다고 믿는 것. 안 된다. "잠깐 쉬어요"를 만드는 장치와 커플을 만드는 장치는 같은 장치다. 하나만 끄는 스위치는 없다.

정말 싫으면 판을 바꿔야 한다. 매번 그룹을 섞어 같은 사람이 두 번 안 붙게 하거나, 뒤풀이를 없애거나, 각자 뛰고 기록만 공유하게 하거나. 대신 그렇게 하면 서로 기다려주는 그 분위기도 같이 사라진다.

15편에서 혼술바가 '혼술'이라는 간판으로 손님에게 퇴로를 준다는 이야기를 했다. 러닝크루는 반대다. 간판에는 달리기라고 써 있는데, 판은 이미 다른 걸 만들고 있다.


러닝크루에서 연애를 금지하는 건, 술집에서 술먹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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