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는 숨으려고 쓰는 게 아니라 말하려고 쓴다? — 300년 전 가면이 그 증거

 

베네치아 가면은 입이 뚫려 있었다

>> 숨기려고 쓴 게 아니라는 증거


베네치안 이머시브 소알레 - PEXXY LINE UP


본계정에서는 좋아요만 누르던 사람이 부계정에 가면 갑자기 말이 많아진다.

익명 커뮤니티에 들어가면 평소에 절대 안 할 이야기를 세 줄씩 쓴다.


우리는 보통 이걸 "숨었으니까 함부로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절반은 맞는 말인데, 나머지 절반이 빠져 있다.

그 나머지 절반을 300년 전 유럽 사람들이 물건으로 증명해뒀다.


신분이 잠깐 사라지는 방

신분이 사라지는 방


17~18세기 유럽. 귀족들의 파티 중에 얼굴을 가리고 오는 자리가 유행한다. 

가면무도회다. 이게 왜 인기였을까. 단순히 신비로워서가 아니다.


당시 사회는 누가 누구에게 말을 걸 수 있는지가 다 정해져 있었다. 

신분이 다르면 같은 방에 서 있는 것조차 어색했고, 먼저 말을 거는 건 무례였다.


그런데 얼굴을 가리는 순간 그 규칙이 정지된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백작인지 상인인지 알 수 없으니 일단 사람 대 사람으로 말을 섞는다. 

신분제 사회에서 이건 굉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 자리는 계속 문제를 일으켰다. 

당국은 여러 차례 규제하려 들었고, 

도덕적으로 위험하다는 비난도 끊이지 않았다. 

뒤집힐 게 있는 사회였기 때문에 뒤집는 놀이가 위험했던 것이다.



그 가면은 입이 뚫려 있었다

입이 뚫린 가면

여기서 진짜 증거가 나온다.

베네치아에서 쓰던 대표적인 가면 중에 바우타라는 게 있다. 

얼굴 위쪽을 덮는 흰 가면인데, 생김새가 좀 이상하다.


턱 부분이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고, 아래가 트여 있다.

왜 그렇게 만들었냐면, 쓴 채로 먹고 마시고 말할 수 있게 하려고다. 

가면을 벗지 않고도 대화가 가능해야 했다.


이 설계가 모든 걸 말해준다.

숨는 게 목적이었다면 입까지 가리면 된다. 

그게 훨씬 쉽고 안전하다. 그런데 굳이 턱을 깎아내고 입을 열어놨다.


그러니까 이 물건의 용도는 조용히 있는 게 아니었다. 

말하기 위한 도구였다.


베네치아에서는 축제 기간 동안 이 가면 착용이 널리 허용됐다. 

얼굴을 가린 채 거리를 돌아다니고, 도박장에 들어가고, 대화를 나눴다. 

도시 전체가 몇 주씩 익명 상태가 됐다.


"너 누구야"는 금기였다


이런 자리에는 규칙이 하나 있었다.

가면 쓴 사람의 정체를 캐묻지 않는 것.

눈치로 알아챘어도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건 판을 깨는 짓이었다.


이게 왜 필요했을까. 정체를 확인당하는 순간 

그 사람은 다시 신분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가면이 만들어준 평평한 상태가 한 번에 무너진다.


지금 익명 커뮤니티의 암묵적 규칙과 정확히 같다. 

신상을 파는 순간 그 공간의 성격이 통째로 바뀐다는 걸, 

그때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 탈을 쓰면 양반을 욕해도 됐다

탈춤 탈

한국에는 더 노골적인 버전이 있었다. 탈춤.

탈춤에는 하인이 양반을 대놓고 조롱하는 대목이 있다. 

말투를 흉내 내고, 허세를 까발리고, 관객 앞에서 우스갯거리로 만든다.


평소에 그랬으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기도 싫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탈을 쓰고 판 위에 있는 동안은 괜찮았다. 

심지어 조롱당하는 양반 본인이 그 자리에 앉아 구경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게 몰래 하는 저항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마을이 날짜를 정하고, 사람들이 모이고, 공식적으로 열리는 행사였다. 

무례를 저지를 수 있는 시간을 공동체가 공인해준 것이다.


그리고 판이 끝나면 탈을 벗고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베네치아와 한국 사이에 이어진 계보는 물론 없다. 

그냥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나 같은 문제가 생겼고, 답도 비슷하게 나온 것이다.




🎭 연출가의 노트

또 다른 나, 배역

무대에 처음 서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주는 건 대사가 아니다. 배역이다.

오디션에서 자기소개를 시키면 다들 굳는다. 

목소리가 작아지고, 손을 어디 둘지 몰라 한다. 


그런데 대본을 쥐여주고 

"너는 지금 화가 난 형사다" 하면 몇 초 만에 사람이 달라진다. 

목소리가 커지고 동작이 커진다.


같은 사람인데 왜 그럴까.

자기 자신으로 나서면 실패했을 때 자기가 다치기 때문이다. 

어색했던 건 나고, 웃긴 건 나다. 

그런데 배역을 받으면 실패해도 그건 배역이 실패한 거다. 

그래서 마음껏 해볼 수 있다.


행사장에서도 똑같은 걸 쓴다.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입을 안 열 때, 

나는 주제를 바꾸지 않는다. 

대신 이름표에 팀명이나 별명을 쓰게 한다. 

그거 하나로 발언 수가 눈에 띄게 달라진다.


본명 옆에 직급이 붙어 있으면 사람들은 직급에 맞는 말만 한다. 

별명이 붙으면 그때부터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정체를 가려준 게 아니다. 책임을 잠깐 옮겨준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 지금까지 

[클럽이 어두운 이유]의 조도

[회식 상석]의 시선

[박수부대 클라크]의 소리

[심포지엄 편]의 농도

[DJ 편]의 이음매

[술게임 편]의 차례

[인플루언서 편]의 명단을 이야기했다.


여덟 번째를 더한다. 배역.


앞의 것들이 판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였다면, 

배역은 그 판에 선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리고 이게 술게임과 정확히 이어진다. 

주사위가 시킨 것처럼 만들어줘야 사람이 나섰던 것처럼, 

배역이 하는 일도 같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이 역할이 하는 것"


이 되는 순간 사람은 움직인다.

즉, 부캐라는 가면을 쓰는 사람들이 

원한 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반대다.



부캐라는 가면은 숨기위한게 아니라
말하기 위한 것이다.






참고 : PEXXY LINE UP


Venetian Immersive Soirée


베네치안 이머시브 소알레

문이 열리면, 가면무도회가 시작됩니다

라씬은 음악, 가면, 왈츠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내는 이머시브 살롱입니다.


베네치안 이머시브 소알레 2

촛불의 황금빛과 로맨틱한 헤이즈 속에,
한 방향으로 바라보는 무대는 없습니다.


베네치안 이머시브 소알레 2



정해진 자리에 앉아 끝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베네치안 가면을 쓰고, 왈츠를 추며

머물며 스며드는 밤을 만듭니다.
관객은 손님이자, 가면무도회의 일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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